1992년 개봉한 장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은 두 주연배우 제인마치와 양가휘의 짧지만 강렬했던 사랑을 인상적인 영상으로 잘 담아낸 영화다. 성숙해 보이지만 여전히 앳된 모습의 프랑스 소녀를 사랑하는 30대 중국인의 절절한 러브스토리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주요 등장인물
어린 소녀 (제인 마치 분)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사업실패로 가난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우연히 만난 중국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애써 부정하며 담담하게 지낸다.
중국 청년 (양가휘 분)
베트남으로 오는 배에서 어린 소녀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정략 결혼할 가문의 여자가 있기에 애써 사랑을 부정했지만, 결국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자임을 깨닫지만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깊이 상심한다.
어린 소녀의 어머니 (프레데릭 메이닌저 분)
어린 소녀의 어머니다. 베트남에서 댐 사업에 아버지의 유산을 쏟아붓지만 사기를 당해서 곤궁한 삶을 이어가게 된다. 환경 때문인지 돈이라면 졸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는 등 다른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어린 소녀의 오빠 (아르노 지오바니네티 분)
어린 소녀의 오빠이자 이 집의 장남이다. 아편에 심하게 중독되어 숨겨 놓은 돈을 어떻게든 훔쳐서라도 아편을 하고 폭력적이다. 어린 소녀와 소녀의 남동생이 그를 혐오하지만, 엄마의 편애 속에서 제멋대로 살아간다.
줄거리
영화의 내레이션은 노년기에 접어든 한 여성의 목소리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녀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옛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배경은 1920년대 후반의 베트남이다. 기숙학교에서 지내는 소녀가 방학이 끝날 즈음 기숙학교에 복귀하기 위해 사이공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다.
이 배에 검은색 차도 선적되어 있다. 운전기사 뒤에 앉아 있는 동양인 청년은 난간에 기대에 바다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모양이다. 담배를 피울 건지도 물어보고 시답잖은 얘기를 해보지만, 소녀의 반응은 냉담하다. 청년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돌아가는 길을 태워다 주겠노라 하고 소녀를 차에 태운다. 청년의 근사한 차량과 차림새, 부가 느껴지는 모습에서 어린 소녀는 호기심과 호감이 생겨나는 듯했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묘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청년은 자신의 손 끝을 나란히 앉은 소녀를 향해 조금씩 옮겨간다. 결국 손과 손끝이 살짝 닿았을 때 청년은 용기 내어 조금 더 만진다. 이내 그 손을 살며시 잡는 소녀의 손. 둘은 서로의 호감을 충분히 느끼고 헤어진다. 이후 몇 번을 더 만나며 결국 참을 수 없는 서로를 향한 끌림과 육체적 욕망으로 격정적인 사랑을 계속하며 1년여를 연인으로 지내게 된다. 소녀도 자신의 현실을 알기에 청년을 욕심낼 수 없었고, 청년 또한 혼인 상대가 이미 있기 때문에 어쩌지 못한다.
하지만 청년의 사랑은 깊어만 가기에 아버지에게 호소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하다. 소녀의 가족을 만났지만 그들의 무례한 행동들에 더욱 절망적이다. 결혼하고 나면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소녀 또한 학업이 끝나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기에 청년은 깊이 슬퍼하며 아편에 의존한다. 예정대로 청년은 결혼했고, 소녀는 베트남을 떠났다. 청년이 결혼할 때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고, 소녀가 떠날 때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청년이 있었다. 그들의 인연은 거기서 멈췄다.
소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책으로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수 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러 인기 작가가 된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프랑스로 왔다는 중국 청년의 전화였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말을 수화기 너머로 전한다.
사랑과 이별의 감정
1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그리워하며, 노년이 다 되어서 결국 그녀를 찾아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 것에 비하면 만남은 너무 짧았다. 결국 시간이 주는 감정은 너무나 상대적이다.
1년을 사랑한 후에 남는 강렬함이 수십 년 같고, 반대로 수십 년간 생각한 단 1년의 기간은 당장 어제처럼 생생하게 남아 추억으로 꾸며져 긴 시간이 되었다.
시절인연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돈다. 불교용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사물이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만들어져야, 즉 시간과 공간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인연(사물)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거다. 우리가 사랑이 타이밍이라고 외치는 것도 어쩌면 시절인연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아직은 그리움과 생생함으로 남는 사랑이 있다면, 어쩌면 이 영화처럼 시절인연이 되어 언젠가는 완성된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한다.